박무현은 스스로의 인생에 엑스트라같은 기분일 때가 있다. 거대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가장자리만 겨우 맴돌다가 중요한건 하나도 알지 못하고 튕겨져나가면 또다른 힘이 그를 끌어당길때까지 고요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떠다니는 것이다. 그건 어디에 닿을지 모르고 말레이 제도 사이를 정처없이 헤엄치는 도마뱀이나 코끼리가 된 기분이었다. 차분하고 안정적이었지만 죽음...
무슨 소문이 나고 있는지 신해량이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상대적으로 무해했기 때문에 방치했다. 이들이 하는 짓은 길가다 돌탑을 보곤 그 꼭대기에 자신 몫의 돌멩이 하나를 올려놓고 그날 하루 운수가 좋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 없었다. 이 경우엔 돌멩이가 아니라 담배와 커피따위였지만 효과는 같았다. 인간의 머리에는 허공에서조차 패턴을 찾아내는 집요하고 허상적인 ...
네 사람은 박살난 의족을 멀뚱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먼저 움직이거나 말을 하면 이 사고의 책임자가 되기라도 할것처럼 두려워했다. 그리고 어쩐지 박무현은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알수 없는 의무감이 들었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감상에 빠져 방관한 잘못이 아주 없지 않는것 같고 연장자로서 그냥 그래야 할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김재희가 먼저 ...
사토와의 대화는 그 주 내내 이상한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그건 커피를 사거나 식사를 하러 갈때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가팀 엔지니어들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딥블루에 찾아오는 환자가 유의미하게 늘었으며 그들 역시 신해량과 관련한 고충이 있다는 뜻이었다. 박무현은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스스로의 가치를 나서서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해저기지내에서 그...
NPIUS 로고 대신 대한도에 있는 병원의 로고가 새겨진 명찰을 가슴 윗주머니에 단 직원은 무기력하지만 고의적으로 관용없는 태도를 뻐겨댔다. 주눅이 든 박무현은 익숙해진지 얼마 되지않은 영문 보고서에 잘못된 스펠링이 있을까 불안에 떨었다. 짙고 굵은 회백색의 머리카락은 그의 어깨 위에 석고조각처럼 무겁고 흔들림없이 말려있었다. "마약성 진통제는 사용 전에 ...
마스크를 쓰고도 하얀김을 뻑뻑 뿜어대는 모습이 위협적이게 보였다. 서지혁은 신해량이 내뱉는 입김에 앞머리가 젖어 얼어가는 모습을 곁눈질하다가 티나게 한숨을 푹 쉬고 공구함을 시끄럽게 뒤적였다. 그러나 신해량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방열문의 찢어진 실리콘을 교체하는데 열중했다. "니퍼 좀 줘봐." "왜 이런것까지 엔지니어팀한테 업무가 내려오는지 모르겠네요...
박무현이 거대한 남자 둘을 따라잡았을 땐 이미 신해량이 블라디미르를 구석에 몰아넣고 있었다. 블라디미르가 뭐라 빠르게 외쳤으나 박무현의 통역기는 비속어와 관용어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해 뜬금없는 단어만 툭툭 튀어나왔다. 뒷걸음질 치던 블라디미르가 무작정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자 그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내쫒기듯 밖으로 도망쳐나왔다. "저 미친새끼들 왜 ...
연구동 광장에 거대한 고래 하나가 해체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범고래 모양으로 만든 원격 인공지능 탐사로봇으로 추적기를 붙여놓은 고래 무리를 따라다니며 그 경로와 서식환경 등을 수집할 목적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미국과 러시아가 합작하여 만들어놓은 물건이었다. 말하자면 스파이캠의 첨단버전으로 프로토타입과 시제품까지 딱 세대밖에 없는, 바다를 이해하...
박무현이 잠에서 깬 건 오후 한시에 가까워져서이다. 누가 입안에 담뱃재를 털어넣은것 마냥 끔찍한 맛이 나고 점막이 모두 바싹 메말라있었다. 금관이라도 쓴것처럼 두통이 관자놀이를 조여대고 허리와 어깨가 욱씬거려 박무현은 한심한 신음만 내뱉을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참한 신체상태보다도 어젯밤의 기억이 그를 무자비하게 짓밟아댔다. "허..." 차라리...
타원와 아치모양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금색 자수 문양을 손톱으로 덕덕 긁자 두꺼운 천 사이로 모래알이 튀어나왔다. 박무현은 온갖 소음과 냄새와 두터운 연기로 호흡하는 모든 시간에 지쳐 갈수록 무거워지는 머리를 나른하게 소파에 기댔다. 술이라도 마신것처럼 관절이 후들거리고 머릿속은 회백색 신경세포 덩어리 대신 담배연기로 가득한 느낌이었다. 평소처럼 이리저리 튀...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어떻게 발음한다고요?" "신해량씨요. 신. 해. 량." "쉰..hey 롼?" "신-해-량." "췬-해-what?!" 네 명의 성인이 둘러앉아 신해량의 이름을 연신 외쳐대는 꼴이 가히 멀쩡해보이진 않았다. 어느 나라 사람을 봐도 개새끼는 본토발음 못지않게 하던데 신해량 세 글자는 발음하지 못한다는 것도 썩 이해가 가진 않는 박무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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